한 팀 있던 손님이 영화가 끝난 후, 마저 나갔다.
마지막 손님들이 본 <아바타>를 플레이어에서 꺼내어 케이스에 넣고, 데크에 진열했다.
푸, 한숨을 내쉬어 보지만 사실 눈은 말똥말똥하다. 시계를 보니 5시 반 남짓하다.
소파와 테이블을 정리. 음료수를 진열. 마무리 청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건물을 나서니 이미 쨍한 햇살이 가득하다.
당혹스러워 시간을 다시 확인했더니 6시. 고개를 무심코 절레절레 흔들면서 차를 기다린다.
인상을 쓰며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언고 하여 내 방을 들여다보니, 그가 매트리스 위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다.
간헐적으로 킬킬거리며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나도 입꼬리에 웃음이 맺혀 눈을 가늘게 뜬다.
- 저 왔어요.
- 아, 수고하셨군요. 오신 줄도 몰랐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일 없던가요?
- 별일이 있을려고요, 똑같죠, 뭐.
그는 '음, 그렇군요' 라고 말하는 듯 잠시 입술을 지그시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쓰러져 책에 집중한다.
- 뭘 그리 재미나게 읽어요?
- 네. 그 뭐야, 당신이 얼마 전에 주문한 책 있지 않습니까.
표지에 반짝반짝하니 잘 생긴 사람이 있길래 궁금해서 조금 들춰봤더니 계속 보게 됐어요. 제목이, 음.
그는 읽던 책을 뒤집어 표지를 확인한다.
- 이거요. <일곱 개의 별을 요리하다>.
- 그거 읽고 계셨구나. 근데 그게 당신을 그렇게 웃길만한 책은 아닌 것 같은데…
- 네, 그럼요. 웃음소리가 좀 컸나 봐요. 알차고 좋은 책인 것 같아요.
그냥 읽다 보니 예전에 이 사람이 방송에서 고든 램지 흉내내던 게 생각나서 말예요.
아, 그랬군.
완전 동감이다.
- 그건 근데 권쉐프보다는 참가자들이 더 웃겼어요.
- 요리 때문에 혼날 때보다 Yes, Shef 한 마디 할 때 더 어색한 거.
- 콜.
그가 깔깔거리자 방 안이 살짝 윙윙거린다. 나도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매트리스 위의 그 옆으로 앉는다.
책을 덮고 그가 날 바라본다.
- 오늘은 유달리 피곤해 보이는군요. 잠이 필요한가요?
- 아뇨. 머리가 조금 울려요. 책상에 저것 좀 갖다주세요, 마시게.
그가 책상 위에 있는 옥수수수염차 페트 병을 가지러 흐느적거리며 날아가는 사이, 매트리스 위에 누워버린다.
- 퇴근하다가 새삼스레 여름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렸어요.
- 여름이잖아요.
- 올해는 역시 특별해요. 봄도 그랬고. 오랫만에 맞는 봄이라는 느낌이었죠. 이번 여름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컵에 차를 따르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 오늘, 아주 오랫만에 여름을 느꼈다?
- 네, 그거요. 바로 그 느낌.
- 기억나는 것 같군요. '잃어버린 계절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했던 당신의 말이 떠올라요. 올해 겨울이었죠.
그가 건네는 컵을 받아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보리차 티백을 한 팩쯤 사 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 당신을 지키기 위한, 하지만 신경을 갉아먹기만 했던 수없이 많은 합리화의 가시.
- 그런데 어느 순간 흐리멍텅하게 뭉개져 장소고 느낌이고 구분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또렷해지기 시작했죠.
- 그걸 당신은 그렇게 표현한 거였죠.
먹먹한 느낌이지만, 불쾌하지 않다. 가슴에 무언가 묵직한 게 들어앉아 있지만, 나쁜 느낌은 아니다.
- 뿌리가 송두리째 드러나는 광경을 온 몸으로 느껴버린 당신이기에 제대로 땅을 딛고 서 있을 수 없었겠죠.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을 쉬는 동안 난 차를 마시면서 윗눈으로 그를 홀끔거린다.
- 당신은 다시 그것을 심고 뿌리를 덮어주는 대신, 다른 것을 선택했어요.
- 하지만,
- 응, 알아요. 당신이 그것을 살리기 위해 어떤 것들을 했었는지.
나는 까딱까딱 움직이고 있는 그의 꼬리를 보았다. 흡사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듯 같다.
- 하지만, 그것이 바로 당신이 그토록 원했던 당신의 시간, 당신의 계절이 돌아온 이유인 것이죠.
- 그 겨울에,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이었나요?
나는 잠시 컵을 멈추었다. 내가 컵을 멈춘 동안 그는 눈을 깜빡거리며 지그시 나를 응시한다.
- 신발이요.
- 신발.
- 집에서 겨울 송년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시장을 봐 와서 음식도 준비하고, 사람들이랑 서로 선물도 하고.
신나게 떠들다가 문득 정리 좀 하러 주방으로 나오다가 현관을 봤는데, 신발이 그득히 차 있었죠.
그는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컵에 담긴 차에 동동거리며 파문이 일고, 창문이 부웅 떨렸다,
그는 한참 동안 웃고, 나는 한참 동안 옥수수수염차만 들여다보며 따르고 마셨다.
- 2010/06/20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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